[18.02.18]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18.02.18]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 눅1:1-4/송영의 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될까 고민을 하기 마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찾은 원리는 성경에 제시되어 있음. 누가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원칙을 찾아봅시다

1. 지혜로운 작가로 하나님을 섬김(눅 1:1-2)
눅 1:1-4; 누가복음의 서문이며 한문장임.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힘. -으뜸에게 버금을 드리는 것은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이신 예수에게 최고의 문장을 바치는 것임. 의사인 누가는 노력해서 명문가가 됨. 목회자, 의사, 작가로 활동( cf.다윗; 왕, 목동, 시인, 악기제조자)
신약에서는 누가가 자기의 맡은 일에서도 최고를 행함. 1:1-5는 일상 헬라어로 적어 독자의 눈높이에 맞춤. 명문으로 시종일관 할 경우 문장속의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을 까봐 일부러 자기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줌.

받은 달란트로 주님을 섬겨야 함. 누가와 다윗같이 받은 달란트를 모두 최선을 다해 사용해야 함. -교회에서 받은 것 사회에서 받은 것으로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함.
한편, 교회안 에서 섬길때 보조를 맞춰서 솜씨를 숨겨야 할때도 있어야 함.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솜씨를 죽여야 할때도 있어야 함.
하지만,누가는 누가복음을 비롯 성경 두권만을 쓰지만 분량은 신약성경 1/4임. 즉,하나님께서 누가를 작품으로 만들어 주심.

2. 착실한 역사가로 섬김(눅 1:3)
당시 영지주의 이단은 두 편으로 갈라져 인성론만 언급하는 편(인도유학설, 막달라마리아결혼설)과 신성론만 언급하는 두편으로 나뉘어져 있는, 거짓 복음을 정리하고 바른 복음을 제시하고자 함. 당시 아직 요한복음은 완성되지 않음. 마태,마가,누가복음에 없는 내용 보충하는 목적 이듯. 누가복음 역시 마태,마가 복음에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집필함. 이를 위해 발로 뛰어다니면서 사료를 발굴함. 그 결과 목격자를 만나 적은 이야기,마리아를 찾아가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졸라서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온 이야기를 기록함.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발굴함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발굴, 탕자비유. 자료를 취합하여 묵상하며 선택하여 역사적인 순서대로 누가복음을 기록함. 또한 논리적인 순서대로 기록함.(필요시 주제적으로 기록함)

- 상황에 맞게 체계적으로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함.
- 매뉴얼을 남겨 정리까지 필요함.

3. 남을 위한 신학자가 됨(1:4)
데오빌로를 위해 성경을 씀. 당시상황을 볼 수 있는 단어 ‘각하’ 고위관리(총독)에게 붙이는 단어. 데오빌로 각하 라고 했다면 현직 고위관리인것으로 추측됨.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데오빌로 여’ 라고 각하라는 말을 붙이지 않음. 이는 사도행전 쓸때 즈음, 데오빌로의 믿음이 깊어지자 ‘각하’를 떼게 된 것임. 누가는 남을 위해주는 신학자로 역할을 충실히 한 것임. 데오빌로를 위해 신약성경 1/4을 작성하였고 혼자 보기 아까워 데오빌로는 돌려보게 됨.
- 구 소련 스탈린 시절 의사 보리스 콘펠트는 변방으로 쫓겨감. 정교회에 박해받던 유대인에게 전도되어 두가지를 결심. 1. 사랑하며 살기.2.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겠다. 콘펠트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수용소에서 깨끗하게 살기로 함. 뇌물에 의해 수술순서가 밀려 수술을 받지못한 젊은 암환자를 수술해줌. 예수를 증언하고 다음날 수용소에서 처형당함. 후일 그 젊은 이가 서양세계에서 글을 써 노벨상을 수상한 솔제니치니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형장에서 콘펠트의 마지막 한마디.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자세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

하나님이 조연이 된 삶을 살지는 않는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이웃에게 증거해야 함.
누가는 모든 달란트를 동원하여 절제하여 사용함.
열심을 내면서 푯대를 향해 나가는 삶을 삶
남을 위해 성도를 위해 주님을 위해 행함.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할 성도가 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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